뭣이 궁금한디? 세계하면된다! 무엇이 진실인가? 교류의 실효값 ㅋㅋㅋㅋㅋ 정식으로! 상인 왕조, 사이스 조 이렇게 간단한데 왜 몰랐지? 최대 규모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알아보셨나요

2020. 10. 16. 22:20카테고리 없음

하잉!@먀리꾸 이지용.반갑게도 마이 홈페이지를 검색해주셔서 감사해요오.:-)날씨가 화창한게 매우 행복해요.언니오빠들은 오늘하루 무엇을 하시면서 보냇나요? :ㅇ오늘 이야기할 키워드는이지요~이제 준비되었으면 남들보다 빠르게 달려나갑니다. 가보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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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는 전압이 시간에 따라 변합니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교류는 변하는 비율이 일정하여 이를 주파수나 각진동수(ω)로 나타냅니다.
각진동수와 주파수(f)의 관계는 2πf=ω 입니다.
단위시간에 전기가 하는 일은 전력(P)으로 나타내며 전압(V)과 전류(I) 사이에 P = V?I 의 관계식이 있습니다.
직류에선 전력은 일정하나 교류인 경우는 시간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변하는 전력을 평균하여 일정한 시간을 주었을 때 같은 일을 하는 직류로 환산했을 때의 값들을 실효값이라 합니다.
교류전압은 각진동수 ω로 주어지는 정현파, V=V0sinωt 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때 그림에 있는 저항에 흐르는 전류도 같은 정현파, I=I0sinωt 로 표시됩니다.
여기서 t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교류의 전력 P는 P = V?I = V0I0sin2ωt = V0I0(1-cos2ωt) 입니다.
(V0: 최대 전압값, I0: 최대 전류값)위 전력을 한 주기에 대해 평균하면, P(평균) = V0I0 / 2 이 됩니다.
P(평균)을 오옴의 법칙을 이용하여 전압에 대한 식(I0=V0/R)으로 바꾸면, P(평균) = (V0)2 / (2R) 이 되고,이를 평균전력을 내는 직류에 대한 식, P(직류) = VI = V (V/R) = V2 / R 과 비교하면 실효 전압은, V(실효)=V0 / 가 됩니다.
한편, P(평균)을 오옴의 법칙을 이용하여 전류에 대한 식(V0=I0R)으로 바꾸면, P(평균) = (I0)2R / 이 되고,이를 평균전력을 내는 직류에 대한 식, P(직류) = VI = (IR)I = I2R과 비교하면 실효 전류는, I(실효) = I0 / 가 됩니다.
예를 들어, 가정용전압 220V는 실효값을 나타대고 실제로는 순간전압 311.
4V와 -311.
4V 사이를 60Hz의 주파수로 변합니다.

이번포스팅은 교류의 실효값 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지식을 쌓으셨나요?오늘 하루도 성공적인 하루 되세요.여기까지 먀리꾸 인사드립니다.다음에 다시만나요~오늘도 여기까지

하잉:-)먀리꾸 이지용.영광스럽게도 저의 사이트를 찾아와주셔서 고마워요.:ㅁ날씨가 맑은게 너무 좋아요.언니오빠들은 오늘하루 무엇 하며 보냇나요? !이번에 이야기할 메인은인데요.이제 준비되었으면 총알보다 빠르게 달려나갑니다. 가즈아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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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제26왕조는 나일 삼각주의 오랜 종교 도시 사이스에서 생겨났기에 사이스 조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이스 인은 억압자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이집트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사이스의 제후 프삼테크 1세는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지배할 때에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한 12명의 제후 중 한 사람이었다.
이 12명의 제후들은 아시리아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극도로 행동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어느 때보다 정정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느 날, 12명의 제후들이 프타 신전에 헌주(獻酒)를 하게 되었는데, 신관이 그들에게 술잔을 갖다주면서 실수로 11개밖에 준비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에 프삼테크 1세가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청동 투구를 벗어 그것으로 술잔을 대신해 사용했습니다.
순간, 다른 제후들은 감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집트의 왕좌에 오를 자는 프타 신전에 청동 술잔으로 헌주를 행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시리아 입장에서는 중대한 반역 행위에 해당되었다.
많은 제후들이 프삼테크 1세에게 나일 삼각주의 늪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 이해가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뜻은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청동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타나면 그의 시대가 개막되리라는 신의 예언대로, 이오니아와 카리아의 용병들이 청동 갑옷으로 무장하고서 이집트를 해방시키려는 프삼테크 1세의 군대에 참여한 것입니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전략가 프삼테크 1세는 아슈르바니팔의 죽음과 함께 내부 혼란이 일어나, 급속히 약화된 아시리아 점령군을 마침내 쳐부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서아시아는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면서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적군에게 짓밟히고, 끝내는 아시리아를 대신하여 신 바빌로니아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프삼테크 1세는 전 이집트를 차츰 장악하여, 기원전 656년에 이집트의 왕 파라오로 인정되었고, 그의 딸 니토크리스는 아몬 신의 미래의 처로 선포되었다.
아직 아시리아가 존재하던 때였지만 혼란 속에 빠져있던 터라 어떻게 조치를 취할 방도가 없었다.
프삼테크 1세는 기원전 639년에 이르자 오랜 기간 이집트를 지배했던 외세의 멍에들을 완전히 벗어버렸다.
그는 중왕국과 신왕국의 수도였던 테베를 지키기 위해 에드푸와 헤라클레오폴리스에 많은 수의 병력을 가진 군대를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이오니아와 카리아, 리디아 출신의 용병들을 고용해 군사계급의 세력 신장을 억제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페니키아 인을 주축으로 강력한 함대를 만들어 해군을 키우고 국제 무역에 참여했으며, 델타 지역의 다프네와 나우크라티스에 밀레시아 인들(아일랜드의 전설적인 조상)을 위한 공장들을 만들었다.
여기서 이집트 산 곡물과 양털이 최초로 수출되었으며, 이것이 발전을 거듭해 프톨레마이오스 조 때에는 곡물과 양털 수출이 대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이스 조의 이집트는 신왕국 때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집트인의 위대함과 번영을 어느 정도 회복했습니다.
도시의 인구는 다시 증가했고, 부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유지되었으며, 국가의 기능은 원상 복구되어 부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가 안정되면서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다.
다른 무엇보다 나일 강의 수량이 증가하면서 수확 또한 풍성해져, 이집트인들은 모두 먹고사는 데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다시금 건설사업이 시작되었고, 많은 신전들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국가가 통제하는 공경제 개념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과도하게 부를 축적한 개인은 파라오의 명령에 따라 재산을 신전에 헌납해야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헌납자는 마음에 드는 신전을 택해 헌납할 수 있었습니다.
사이스 조는 고왕국의 행정체계를 본받아 파라오 곁에는 세습제가 아닌, 능력에 기반을 둔 '비밀이 수장들'과 행정각료들이 보좌했고, 경제 번영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나일 강의 항해와 안전을 책임지는 '선박 및 운항책임자'가 있었습니다.
파라오는 국가산업의 진흥을 위해 농부들과 장인들의 활동을 지원했고, 그 지원책의 하나로 과중한 세금을 일부 면제해주는 특별 조치를 취하곤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시대 말기에는 과거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습니다.
특히 사이스 조는 과거의 모든 것을 이상적인 모범으로 생각하여 철저하게 모방하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의 2,000년이 지난 〈피라미드 문서〉에 경의를 표했고, 장인들은 고왕국시대의 석실분묘의 특징을 그대로 모방했습니다.
이처럼 전통을 중시하는 건축술과 예술은 나름대로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법 중에서도 딱딱한 돌로 비명(碑銘)을 다듬은 솜씨는 나무랄 데 없었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형식을 내용보다 더 중요시하게 되면 타성에 빠져 기본이 되는 것을 추상화시켜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과거에 대한 집착은 쇠퇴기에 접어든 사회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말기시대를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에서 아시리아가 추방되고, 사이스 조가 시작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이스 조의 파라오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허용했으며, 육군과 해군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과 때론 타협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나일 삼각주 안에 나우크라티스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서 자기네 언어를 사용하면서 모여 살았습니다.
이 도시는 그야말로 그리스인들의 무역을 위해 존재합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집트인들은 그리스인들을 대체로 유치하고 미개하며, 대단한 속물들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돈'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인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재화나 '돈'과는 거리가 먼 경제 생활을 해왔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가치에 따라 현물을 바꾸어 쓰는 '물물교환'을 주로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 이집트인들에게 그리스인들은 화폐에 대한 개념을 주입시켜주었다.
어떻든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비친 그리스인들은 물질만을 추구하는 모리배들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토착 이집트인들은 그리스인들을 폄하하고 혐오감을 갖고 있었는데, 사이스 조가 그리스인들에 대해 특혜조치를 베풀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뒤 페르시아 제국이 이집트를 침입했을 때, 이집트인들이 사이스 조에 등을 돌리는 주원인으로 작용했으며, 페르시아인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도 이집트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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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20년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건립된 지 이미 60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프톨레미 1세에 의해 세워진 이 도서관은 프톨레미 2세 때는 새로 건립된 박물관의 기능 중에서 도서관이라는 한 부분만 담당하게 되었지만 학문적인 중요도나 유명세에서 박물관을 훨씬 능가했습니다.
설립 초창기 때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이 도서관을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재원을 퍼부었다.
프톨레미 1세는 아테네에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학원(Aristotle's Lyceum)과 플라톤 학파의 학원(Plato's Academy)을 능가하는 시설을 갖추려고 했습니다.
국제무역과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세계의 석학과 예술가들을 끌어들이기 쉬웠고, 따라서 이 도서관은 학술과 배움의 전당으로 전례 없이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프톨레미 1세의 뒤를 이은 통치자들도 그 뜻을 이어받아, 도서관 서고에 더 많은 예술, 과학, 문학 작품과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도서를 구입했습니다.
책들은 당시 제일가는 서적시장이던 아테네와 로도스에서 주로 구입했으며, 한동안 최고의 도서관으로 알려졌던 아리스토텔레스 도서관의 책들을 통째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집이 전부 정당한 방법으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프톨레미 3세는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해 있던 배에서 온갖 책을 압수한 다음, 복사본을 만들어 원본 대신 돌려주었다.
그래서 그가 수집하여 소장된 것들에는 '선박 도서관'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는 또한 아테네 최고의 저작자와 극작가들의 작품들을 안전하게 보관해준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취득하기도 했고, 다른 도서관에서 대량으로 책을 빌리고 나서 원본 대신에 복사본과 권당 은화 15탈렌트를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강제와 속임수 그리고 한없는 정성이 큰 성과를 거두어, 설립된 지 60년 만에 이 도서관은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지적 보고가 되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식과 학술을 연구 · 육성시키는 문화의 중심 센터가 되었다.
당시 이 도서관에는 여러 장의 지초(紙草) 두루마리로 만들어진 서적 20만 권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소장도서가 49만 권이었다고 말하는데, 어떻든 사본을 뺀 진본만 12만 권 이상이 소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는 많은 수의 직원들이 일했으며, 사서들의 업무량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구입되어 들어오는 새로운 서적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출처나 전 소장자 혹은 발행자를 명기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일일이 손으로 사본을 만들어냈고, 많은 서적들을 그리스 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계 최대의 도서관 역할을 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헬레니즘 문화의 개화에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어주었고, 클레오파트라 치세 때는 무려 70만 권가량의 두루마리 책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 1500년 후에 타자기가 발명되기 전, 유럽 전체가 보유하고 있던 전체 도서 양의 무려 10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소아시아의 부유한 도시, 페르가몬에 있는 도서관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비길 만했습니다.
그러나 마루쿠스 안토니우스가 그곳에 있던 20만 권의 두루마리 책을 몰수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사하는 바람에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더더욱 절대적이고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학문적 위치를 높이기 위해 한때 파피루스 지의 수출을 중단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집트가 아닌 다른 나라의 학자들은 양피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양피지는 둘둘 말기보다는 쌓기가 훨씬 수월해, 현대식 같은 책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실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전해오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작가 세네카가 이에 대해 최초로 언급했습니다는데,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그는 4만 부의 쓸모없는 두루마리 책이 타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4세기 말 로마의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는 단지 기독교에 반하는 '이교'라는 이유만으로 이 도서관의 중요 부속 건물인 세라피스 신전을 불사르도록 했는데, 이때 약 20만 부의 귀중한 두루마리 책이 타버렸다.
그나마 남은 책들은 서기 640년에 알렉산드리아를 침입했던 아랍인들이 땔감으로 써버렸다고도 말해지는데, 이 말은 아랍과 이슬람을 적대시하던 후대의 서구 작가들에 의해 조작되어진 것 같다.
어떻든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지성의 시대가 가고 암흑의 시대가 다가옴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수학, 천문학, 응용과학 분야에서 성취했던 이 시대의 엄청난 지식들은 수세기 뒤 바그다드의 아바스 조에서 이슬람 문명이 활짝 꽃피면서 비로소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또다시 수세기가 지난 후 유럽의 르네상스를 거쳐 그 맥이 이어지기도 했으나, 수많은 자료들은 안타깝게도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